시인의 이름을 가진 남자의 방은 그 이름의 옛 주인 삶이 그러했듯 춥고 고즈넉했다. 겨울바람이 창문을 덜커덩, 흔들고 지나가면 해경은 이불 아래 웅크린 몸을 더욱 둥글게 하며 책장을 넘기곤 했다. 해경의 좁은 자취방에는 기백 권의 책들이 쌓여 있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나면 책에 깔려 죽을 거예요. 지인은 이따금 그런 농을 하며 웃었다.
지인은 겨우내 해경의 방에서 머물렀다. 그이는 해경의 한 학년 아래 후배였다. 인사만 몇 차례 나눈 게 고작이던 지인이 짐가방을 둘러메고 찾아든 것은 가을도 중반을 넘긴 즈음이었다. 복학을 하려니까 집이 빚쟁이에 쫓기고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소주잔을 비우던 지인의 눈가에 어린 피로가 해경의 마음 어딘가에 걸렸다. 귀뚜라미가 요란스레 울던 밤, 해경은 잠든 후배의 몸 위로 한 채밖에 없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날부로 지인은 여러 선배와 동기들의 방을 전전하던 생활을 접을 수 있었다.
수더분한 성미의 해경인지라 지인이 제집처럼 지내도록 나름 배려를 한다고 했는데도, 수업에 다녀오면 어느샌가 지인이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해 놓곤 했다. 점차 시간이 지나자 해경도 그에 익숙해져, 요리하는 지인을 어깨너머로 넘겨다보며 오늘 저녁은 볶음밥이구나, 그런데 양파가 좀 적지 않니? 따위의 말을 건네게 되었다.
-우렁각시와 사는 기분도 나쁘진 않지만, 넌 수업은 안 들어가니?
-단위 수가 적어서 그런 거예요. 형 안 계실 때 다 출석하고 있어요.
동거가 시작되고 몇 주가 지나도 지인이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책이었다. 해경이 보기에, 지인은 전공서 외의 책은 일절 읽지 않았다. 필경 손댈 엄두가 안 나는 탓도 있을 테지만. 다만 지인은 해경이 책을 읽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썩 좋은 목소리는 아님에도, 그래서 다소 부끄러워하면서도 해경은 지인이 조를 때마다 읽고 있던 책을 한 단락씩 읽어주었다. 나는 어디까지든지 내 방이 - 집이 아니다. 집은 없다. - 마음에 들었다. 방안의 기온은 내 체온을 위하여 쾌적하였고 방안의 침침한 정도가 또한 내 안력을 위하여 쾌적하였다. 나는 내 방 이상의 서늘한 방도 또 따뜻한 방도 희망하지는 않았다. 이 이상으로 밝거나 이 이상으로 아늑한 방을 원하지는 않는다. 내 방은 나 하나를 위하여 요만한 정도를 꾸준히 지키는 것 같아 늘 내 방에 감사하였고, 나는 또 이런 방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아서 즐거웠다….
좁은 방, 언제나 밤은 짧았고 책의 페이지 수는 길었다. 해경은 책을 읽다 안경을 낀 채 잠이 들기가 일쑤였고 다음날 눈을 떠 보면 안경과 책은 가지런히 앉은뱅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책갈피를 끼워두는 것 역시 잊지 않은, 아직 잠든 채인 지인을 내려다보며 해경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는 지인이 깨어나면 가장 먼저 묻곤 했다. 내가 혹시 잠꼬대라도 하지 않던?
***
봄이 오면 해경은 언제나 감기를 앓았다. 그 해에도 그이는 어김없이 학기초부터 자리에 누웠고, 지인은 묵묵히 아침상을 치우고는 학교로 향하기 전, 물이 든 컵과 약을 챙겨 쥐여주었다. 불 같은 이마에 얹을 수건을 적시는 것도 지인의 몫이었다. 지인은 혼자 살던 때에는 누가 병시중을 들어줬는지 굳이 묻지는 않았다. 다만 그이는 귀갓길 재래시장에 들러 검은 봉지 한가득 딸기를 사와서는, 헹구고 꼭지를 따 해경이 깨기를 기다렸다.
하루는 해경이 약을 삼키지 못하고 켈룩거리면, 지인은 약을 손바닥에 뱉어내게 했다. 물을 마시게 하고는 이미 반쯤 녹은 흰색 알약을 입에 넣어주니 쓴맛에 해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지인이 락앤락에 담아두었던 딸기를 꺼내왔다.
-형, 딸기 먹어요. 많이 좀 먹어요.
***
그해 여름은 유난히 눅눅하고 후텁지근했다. 열린 문 대신 늘어진 대나무발이 흔들거렸다. 지인은 맨바닥에 늘어붙듯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해경이 알전구등을 켰다. 그러고는 책을 한 권 집어들고서 바닥까지 친 모기장 아래로 기어들어왔다.
-형, 선풍기 안 사면 저 미칠지도 몰라요.
방에는 선풍기가 없었다. 지인이 이유를 묻자, 해경은 간단히 대답했다. 책장이 날리잖니. 체념과 교류하는 법을 익힌 지인이 연방 부채질을 하며 모로 누웠다. 방에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같은, 그 흔한 소일거리 하나 없었다. 그저 쌓이고 쌓인 책만이 여흥이고 오락인 갑갑한 방이 뭐가 그리 좋다고, 해경은 불평 한 번 하지 않는 후배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꼈다. 물론 선풍기는 사지 않았다.
그날 골라든 책은 헤세의 지와 사랑이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바로 그 역할은 오직 골드문트만이 할 수 있었다. 이제 다시 떠나고 없는 친구를 그리워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를 생각하며 그리움에 잠겼다….
책장 속에서 무엇인가가 팔랑이며 떨어졌다. 집어드니 그것은 책갈피 대용으로 끼워두었음 직한 사진이었다. 순간 눈앞이 어찔해지는 기분에 해경은 자신도 모르게 사진을 구기고 말았다. 동시에 지인이 몸을 기울여 들여다보았다.
-…누구예요?
-어… 예전에 같이 살던 사람이야.
일순 마주친 지인의 눈동자가 평평한 마분지처럼 보였다는 사실을 해경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이는 그저 후배의 시선을 피하며, 여상스러움을 가장해 사진을 쓰레기통에 밀어 넣었다. 지인은 그 일련의 동작들을 끝까지 지켜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고는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손선풍기라도 좋으니까, 하나만 사요.
안 그러면 정말 돌아버릴지도 몰라, 지인이 마음속에서 그렇게 덧붙였다는 사실을 해경은 물론 알지 못했다.
***
문득 돌아보니 지인이 처음 해경의 방을 찾아들었던 계절이 와 있었다. 해경은 부러 묻지도 않았고 또 지인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 지인의 집은 좀 형편이 피어 따로 사는 아들에게 용돈이나마 쥐여줄 수 있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해경의 방에서 나올 수도 있겠지만 지인은 그러지 않았다. 다만 해경이 눈치채지 못하는 한도 내에서 나날이 찬거리만 호화로워지고 있었다.
그날은 가랑비가 내렸다. 접이식우산 두 개가 서랍장에 그대로인 걸 보니 해경은 빈손으로 수업에 들어간 모양인데, 마중을 나가야 할까 싶어 날씨를 살피던 중이었다. 점퍼에 팔을 꿰어넣고 방을 나서려는데 누군가 우산을 든 채 집앞에 서 있었다. 감청색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지인의 스니커즈가 정지했다.
-죄송한데, 여기 살던 사람 이사갔습니까?
-누굴 찾으시는데요?
-김해경이라고, M대 건축학과 다니는 사람인데 혹시 아십니까? 아직 졸업은 안 했을 텐데….
지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남자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썩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이 어렴풋 떠올랐다.
-지금 수업 들어갔는데요. 무슨 일이시죠?
-그 친구가 제 책을 좀 많이 맡아주고 있어서 말입니다.
침묵. 지인은 언젠가 해경이 버렸던 사진을 기억해냈다.
-…혹 해경이 아시거든, 한성하가 다녀갔더라고 전해주세요.
침묵. 지인은 언젠가 잠든 해경의 몸 위로 홑이불을 덮어주던 때, 그이가 잠결에 중얼거리던 이름을 기억해냈다.
***
해경은 성하의 두 학년 아래 후배였다. 두 살 때부터 지방의 백부 댁에서 자라온 그이는, 기숙사 추첨에서 미끄러지자 갈 곳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동기와 선후배들의 방을 전전하던 해경을 거두어준 것이 성하였다. 그이들은 책이 그득한 성하의 방에서 이 년을 함께 살았다. 방은 생활공간이며 놀이공간이자 휴식공간이었다. 입시용 문제집과 전공서 이외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던 해경은, 성하가 쌓아놓고 읽는 온갖 나라의 문학서에 호기심을 보였다. 성하는 어린 후배에게 때때로 이상의 시를 읽어주었다. 그이들은 알전구 아래 나란히 엎드려 책을 읽다 잠들곤 했다.
해경이 처음으로 안경을 맞춘 날은 성하가 처음으로 해경을 안았던 날이기도 했다. 그이들은 책 냄새가 나는 좁은 방에서 옷도 다 벗지 않은 채로 몸을 섞었다. 방에는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었다. 땀과 체액의 냄새는 고스란히 책들 사이로 가라앉았다. 해경은 서툴러서 더 거칠게 몸을 움직이는 서슬에 퉁겨져 나가 깨진 안경을 다시 맞춰야 했다.
성하는 졸업도 하기 전에 B시에 본사가 있는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그이는 얼마 안 되는 짐 속에 이상 전집 두 권을 끼워넣어 B시로 떠났다. 그리고 그이의 방에는 산더미 같은 책들과 해경이 남았다.
***
겨우내 해경은 다리를 절었다. 학사 앞 계단에서 눈을 밟고 미끄러진 탓이었다. 지인은 목발을 짚은 해경의 가방을 들어주느라 항상 자신의 수업에는 지각을 해야 했다. 학기말 고사가 끝난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이불 속에서 몸을 둥글려 책을 읽던 해경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지인도 언제부터인가 읽게 된 자신의 책장을 가만히 넘기고만 있었다. 겨울바람이 덜커덩, 창문을 흔들고 도망치면 해경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B시에 가고 싶다.
-왜요, 바다 보려고요?
-…응….
지인은 근처 피씨방에 들러 열차표를 예약했고, 하룻밤 치의 짐을 꾸렸고, 해경의 마른 몸을 부축해 객차에 앉혔다. 열차가 흔들림도 없이 B시로 향하는 동안 해경은 창밖만 하염없이 내다보았다. 지인은 호주머니 속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또 눈이 오려는지 구름이 몰려들어 있었다.
번쩍번쩍하는 빌딩 앞에 서 기다리는 내내 해경은 안절부절 못해했다. 멀찍이 선 지인은 서툰 손놀림으로 담배를 피웠다. 점심을 먹으러 나오는 직장인 무리 사이에서 감청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명백히 곤혹스러워하는 눈빛으로, 그는 해경을 노천카페로 이끌었다. 지인이 담배를 떨구어 스니커즈로 문대어 끄고는 다섯 대째의 담배를 꺼내 물었다.
대화는 짧았다. 침묵만이 길었다. 바쁜 걸음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 너머로 두 사람을 지켜보는 지인에게는 얼마 안 되는 대화나마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그이는 한 가지, 해경이 꺼내어 내미는 책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세 권째의 이상 전집. 승강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치 어색한 승강이가 오가고, 결국 감청색 정장을 입은 남자는 책을 받아들지 않았다. 해경의 어깨가 떨구어지는 것을 보며, 지인은 비어 버린 담뱃갑을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뜨렸다.
***
-바다 보러 가죠.
책과 함께 남겨진 해경은, 지인이 두 갑째의 담배를 비우는 동안 고개를 떨어뜨린 채 미동도 없었다. 지인은 마침내 두 번째 담뱃갑을 떨어뜨리고, 그러고는 가방을 짊어지고 천천히 그이에게로 다가갔다. 해경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 그이는 미약하게 움찔했다. 지인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바다, 보러 가요.
***
마른 몸을 업어든 지인이 그림자를 드리운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은 차가웠고 등 뒤로 기대오는 해경의 몸은 가늘게 떨렸다. 모래사장에는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인은 천천히 오후의 해변을 거닐었다. 먼 하늘에서 갈매기들이 울고 있었다. 파도가 달리듯이 밀려왔다, 거품이 되어 흩어져가기를 반복했다.
모래의 바다 한복판에 책들이 쌓여 있었다. 옆으로 길게 쌓인 모양새가 흡사 책의 무덤처럼 보였다. 가장 위에 있는 것은 두 권의 이상 전집이었다. 지인은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일순 입을 벌렸다. 그이는 소리내 말했다. 날자. 지인은 뒤로 돌더니 서서히 해경의 몸을 내려, 책 위에 반듯하게 눕혔다. 해경은 눈을 감은 채로 깨어나지 않았다.
해경에게서 안경을 벗겼다. 묵직한 은테를 잠시간 관찰하듯 보던 지선이 그것을 자신의 두 귀로 걸쳤다. 어지러움이 찾아듬과 동시에 시야가 부옇게 번져났다. 그이는 주머니에서 지포라이터를 꺼내들었다. 탁, 불붙은 은색의 라이터가 그이의 손에서 해방되었다. 순식간에 옮아붙은 불길은 날개처럼 거대하게 자라났다. 핥는 듯한 뜨거움에 지인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이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지인은 해경과 해경의 책들이 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해경과 해경의 모든 책들이 불길 속에서 재로 화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이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지인의 방은 낡고 비좁았다. 그이는 해경이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해 대학가 원룸촌을 벗어난 뒤에도 그 방에서 일 년을 더 살았다. 밤이면 지인은 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그의 방에는 기백 권의 책이 쌓여 있었다. 그이는 때로는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의 첫 일기는 해변에서 이상 전집의 세 번째 권을 태우던 날에 쓰여졌다. 그날 보았던 해경의 옆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쓴다는 것이 나날의 습관이 되어갔다.
그러나 지인은, 자신이 해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끝까지 적지 않았다. 김해경에 대한 양지인이 품었던 감정과 환상들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채 온전히 그이 자신의 것으로만 남았다.
덜커덩, 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지나갔다.
* THE YELLOW MONKEY - <聖なる海とサンシャイン> PV의 오마쥬임을 밝힙니다.
* 이상 <날개>
*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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