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밤의 품을 파고들어 그 하얀 온기로 괴괴한 암흑을 적셨다. 부드러운 공기는 지친 소년의 뺨을 쓸어내리는 여인의 손길처럼 매혹적이었고 쿠키만큼이나 달콤했다. 봄의 향기에 취해 뜨거워진 머리는 강렬한 욕망을 느끼고 있었고 나는 내 몸이 원하는 행동을 취했다.
나는 쿠키를 한웅큼 쥐어들었다.
과자 부스러기와 약한 술내음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웃옷을 대충 털어서 걸어두고 창가에 기대어 섰다. 쿠키를 씹으며 창턱에 팔을 고인 채 멀거니 바라본 세상은 잔 로디엄이 발을 딛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곳인 것처럼 보였다. 침묵의 바다에 수장된 도시는 마법 같은 달빛 아래 뽀얀 윤곽이 되어 되살아났고 그 비현실적인 풍경화는 나에게 특정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식인 괴수 내지는 흡혈귀가 나타난대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신비스러움, 혹은 터무니없음이었다. 그 증거로, 잠의 요정들이 모조리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눈꺼풀을 문질렀다. 제길. 눈이 무지하게 뻑뻑하고 시야가 흐릿한데도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삼천백이십 마리째의 양을 세는 것을 그만두고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테레샤의 쿠키. 생각한다. 아가씨의 새된 고함. 집사님의 그늘진 옆얼굴. 생각한다. 주인님의 깡마른 어깨와 목덜미. 생각한다. …테레샤의 쿠키.
마지막 단어를 연상해내기까지 시간이 다소 필요했다. 나는 옷장 손잡이에 걸쳐놓았던 조끼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쿠키가 남아 있었다. 셔츠와 바지를 뒤져 긁어모은 쿠키는 제법 군것질거리가 될 만해 보였고, 나는 갑자기 주인님을 살찌워야겠다는 욕구가 일어난 것도 봄밤의 마법 때문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실제로, 고민해야만 했다. 오밤중에 쿠키 배달을 핑계로 고용주의 방문을 두드린다는 행위가 가져올 파급은 나의 직업에 아주 확실한 변화를 줄 수도 있었다. 실업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청력에 주의를 기울였다. 문짝에 머리를 기대듯이 귀를 대고 있기를 잠시, 서서히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접시를 떨어뜨리면 안 되는데, 몰래 부엌에서 꺼내온 접시를 깨뜨리는 것보다 테레샤의 쿠키를 먼지구렁에 떨어뜨리는 쪽이 훨씬 불경스럽게 느껴지는 이유 따위를 생각하며 겨우겨우 접시를 무사착륙시켰고, 기다렸다는 듯이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거의 튀어오르듯이 일어났다, 라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다만 그 정도로 놀랐다고만 해두자. 주인님은 야트막한 잠에 발목을 감겨 허우적대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어, 이런 시간에 웬일이시죠?"
"내가 먼저 물었는데."
더 이상 헛소리를 하기 전에 빨리 진짜 이유를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인님이 좀 남아서 쿠키가 생각났습니다."
"…바닥에 있는 저거 말이야?"
아주 가지가지로 한다. 나는 주인님을 존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최소한 저 놀라운 이해심과 인내력만큼은 성인급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상황에서 제정신이 아닌 건 내가 틀림없다. 나는 얼른 접시를 챙겨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바닥의 접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니, 세 개로 늘어나 있었다.
태평스러운 동작으로 쿠키를 입에 넣으며 주인님이 말했다.
"그러고보니 이게 오늘 처음으로 먹는 거군. 잘 가져왔어."
자세히 보니 벽을 따라 늘어선 그것은 음식이 담긴 접시와, 그 접시들을 얹은 쟁반이었다. 이미 식어버린 식사를 치우면서 유하스 아주머니가 어떤 얼굴을 하셨을지. 나는 접시를 가져가는 주인님을 보았다. 뺨과 소매에 묻은 물감이 굳어가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까?"
"응. 보겠어?"
"그래도 되나요?"
"완성되면 보여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새로운 그녀야."
자칫 바람둥이의 대사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참으로 순진무구한 미소였지만, 그러나 나는 억지웃음밖에는 지을 수가 없었다. 역시 존경은 그만두어야겠다. 난 지나치게 멀쩡하다.
침실 맞은편의 반쯤 열린 문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어쩌면 주인님이 미친 것은 이 방에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를 가장 먼저 의심했다.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구현해낸 듯한 작업실이었다. 결코 짧지 않은 길이의 벽과 벽을 모조리 채우고 있는 것은 산더미 같은 스케치북들이었다. 그 사이사이를 몽당연필과 조각난 지우개, 찢어진 종이 따위가 구르고, 중앙부에는 더께를 덮어쓴 캔버스들이 방치에 가까운 모습으로 위태롭게 쌓여 있었다. 그 한가운데, 의자와 이젤과 접이식 테이블을 구심점으로 비틀어진 물감 튜브들이 흩어져 도저히 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공간으로 주인님이 걸어들어갔다.
거의 발끝으로 걷다시피 해 다가가자 이젤 위에 얹혀 있는 캔버스 앞면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신음을 삼켰다. 소녀의 얼굴은 이전에 보았던 그대로였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녀의 옷을 알고 있었다.
"아름답지?"
"예, 제가 본 어떤 여자보다도요."
나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고 주인님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서 스케치북을 꺼내 떠안겨주는 주인님의 표정은 들뜬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소녀를 스케치한 연필화를 하나하나 넘겨보아야만 했다.
정원에 선 소녀, 인형을 품에 안은 소녀, 화병과 소녀, 부채를 든 소녀, 그림책을 읽는 소녀, 아기와 노는 소녀, 양산을 쓴 소녀. 수도 없이 이어지는 그림들 속에서 나는 주인님이 경외감 비슷한 시선으로 소녀를 화폭에 담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내가 딛고 선 이 방이 마치 신전처럼 느껴졌다. 알려지지 않은 여신을 섬기는 신전에,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인 그녀의 사제와 함께 있는 것처럼.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소녀의 그림이 갑자기 끝난 덕분이었다. 섬세한 연필선이 소녀를 대신해 그려낸 것은, 맙소사, 놀랍게도 클로디아 아가씨였다. 하지만 나는 주인님의 모델이 된 아가씨를 상상할 수 없었다.
"이건 아가씨로군요?"
주인님이 어깨 너머로 스케치북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찡그리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아니야, 그건…, 그렇군. 클로디아이겠군."
이해할 수 없는 혼잣말의 말미에서 주인님의 목소리는 아주 끔찍하게 들려왔다. 다음 순간, 나는 문짝에 맹렬하게 등을 부딪쳤다. 야윈 손이 야생동물 같은 동작으로 내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괴물을 목도한 사람 마냥 창백하게 질린 채, 주인님은 괴물 앞에서나 발휘될 수 있을 어떤 초인적인 힘으로 내 목을 짓눌렀다. 빛을 등져 어두운 얼굴에서 시퍼렇게 안광이 번득였다.
"말해선 안 돼. 특히 앨번에게는, 알겠어?"
나는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기괴한 신음 같은 것만이 목에서 흘러나왔다. 겁에 질려 서둘러 고개를 앞뒤로 움직였다. 그러자 주인님의 손이 풀렸다.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나는 세차게 기침을 했다. 목을 어루만지던 손길 그대로 주인님을 원망스레 올려다본 순간 눈물이 고인 것도 같다. 이런 꼴을 당해야 하다니,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지?
캔버스 속에서 소녀가 대답했다. 그녀의 파란 원피스, 흰 코르사쥬. 무덤가의 유령이 태우던 옷. 그 순간 무성의하게 넘겼던 소녀의 그림들이 오랜 기억들과 결합하며 재구성되었다. 소녀가 입고 있던 다양한 옷들은, 전부 클로디아 아가씨의 옷들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단 한 번도 아가씨에게 배달되는 일 없이, 집사님의 손을 거쳐 주인님에게 인계되었다. 언제나.
경악에 찬 눈으로 주인님을 보았을 때, 주인님의 뒷모습은 침울히 캔버스를 흰 천으로 덮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앨번이 주문한 귀걸이, 어떤 거였지?"
심장 내려앉는 줄 알았다. 주인님은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고 나는 다리를 얻은 인어처럼 소리도 못 내고 얼어붙었다.
"복도에 인수증을 흘리고 갔던데."
정신적인 신음을 함께 흘려야 했다. 바보를 지칭하는, 생각나는 모든 단어들을 한 번씩 내면을 향해 쏟아내준 후에야 간신히 목소리가 돌아왔다.
"엄지손톱만한 호박이었습니다."
정적. 짧던 정적이 점점 길어지며 발을 재촉했다. 나는 황급히 복도로 빠져나왔다. 문을 한 차례 돌아보고, 목 언저리를 만져보다가, 소스라치며 손을 놓고, 계단 아래로, 마침내 방으로 도망쳐온 내내, 수면욕보다도 강력한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다. 창문 밖에는 새벽이 파랗게 찾아들어 있었다. 또다시 예의 원피스를 떠올린 나는 치미는 분노와 공포를 억누르며 침대로 몸을 던졌다. 이번에 잠은 공포보다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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