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가운 아래로 늘어진 소녀의 다리는 가늘고 길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두 무릎을 끌어안은 채, 소녀는 그 곁에 가만히 서서 시선을 내리뜨리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엄마 얘기를 들려줘."
소녀가 입술을 달싹인다. 남자는 일순 주저하며, 그러나 입을 열자 흔들림 없이 말을 잇는다.
"아가씨의 어머님은... 아가씨를 꼭 닮은 금갈색 머리카락과 파란 눈이 인상적인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속삭이는 듯한 물음. 남자의 내리깐 시선이 점차 이동해, 이윽고 그녀의 발을 감싼 슬리퍼에 닿아 있다.
"아주 활달하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감정의 기복도 큰 편이었지요."
남자의 입술이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말을 읊조린다. 저는, 그녀를, 정말로, .....
이윽고 슬리퍼가 책상 아래로 떨어지자 소녀의 희고 마른 발이 드러난다. 그 어린 발을 장갑 낀 두 손으로 받쳐들어 거기에 이마를 가져다대는 남자의 그림자가 훅, 서재의 등불을 꺼버린다. 소녀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떠오른다.
눅눅한 공기가 옷 속으로 파고들며 등줄기를 훑어내렸다. 지하실은 오한이 일 만큼 서늘한데다 온동네 유령들이 아지트로 삼고 싶어한대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음습하기까지 했다. 내가 저택에 온 이래 장거리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버리지 않았으니 어딘가에 있긴 있다는 여행 가방은, 장담한다. 가방 자신도 스스로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그런 여행 가방의 서글픈 말로에 눈물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덜 피곤했다면 그러리라는 말이다.
나에게는 지하실 탐사용 기계장치 정도의 인간성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성은 진작에 바닥을 드러냈고 정신력은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잠의 요정은 나에게 빨판상어가 상어에게 보이는 만큼의 예의도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잔 로디엄의 인간다움을 모조리 핥아먹고서는 내 눈꺼풀에 무게를 더하며 깔깔댔다.
결정적인 문제는, 요정은 오직 나에게만 보였다. 클로디아 아가씨는 내 손에 랜턴을 쥐여준 다음 가차없이 등을 떠밀었고 나는 홀로 - 아니지, 요정과 단둘이 - 쫓기듯 지하로 내려와야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좋게 말해 창고,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잡동사니 전시장이었다. 잔디깎는 가위가 처박혀 있는 것은 그렇다치자. 아마 새것을 사용하고 싶다는 욕망에 못 이긴 아르킨이 저지른 짓이리라. 둘둘 말린 채 바닥을 구르는 무엇인가는 얼핏 종이처럼 보였으나 들춰보니 옷감이었다. 바깥에 드러난 부분만으로는 본래의 색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것은 노란 랜턴 불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천을 뒤집어보려던 나는 거의 던지듯 그것을 내려놓고는 화급히 손을 털었다. 그 밖에도 유래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수두룩했다. 용도가 짐작이 가는 것은 열 손가락으로 꼽아도 될 듯했지만, 그 안에 가방은 포함되지 않았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지만 변명이 통할지는 의문이었다. 뻑뻑하니 잘 움직여주지 않는 문을 닫고 고개를 들었다. 통로 맞은편으로 또 다른 문이 보였다. 애당초 탐사 대상에서 제외했던 식품 저장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창고가 이런 상태라도 - 나는 등 뒤의 문을 다시 한 차례 돌아보았다 - 설마 식품 저장실에 여행 가방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볼을 부풀리며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보였다.
랜턴을 내밀며 한 걸음 나아갔다. 통로는 계단을 지나 식품 저장실 입구에서 직각으로 꺾여 조금 더 깊숙이 이어져 있었다. 그 끄트머리, 기름을 태우는 가물거리는 빛이 작은 철문에 닿았다. 녹슨 자물쇠에서는 금속 냄새가 났다.
자물통을 만지작대던 내 머릿속을 별안간 스치는 것이 있었다. 나는 랜턴을 들지 않은 왼손을 조끼 주머니에 넣었고, 무엇인가가 딸려올려왔다. 어쨌거나 아르킨은 좌절을 모르는 사나이이고, 미나가 무덤가의 유령이 떨구고 간 증거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더라도 곧 다른 선물거리를 찾아나설 터였다. 나는 코르사쥬의 날카로운 핀을 열쇠구멍에 밀어넣었다.
잠시 뒤 나는 잔 로디엄에게는 사실 빈집털이의 소질이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유령의 단발마처럼 들리는 소리를 내며 열린 철문 뒤로 무한에 가까워 보이는 계단이 살아 꿈틀거렸다. 착각이다. 살그머니 발을 내딛자 계단은 굳건히 내 무게를 지탱했다.
계단은 길고 길었다. 습한 냄새가 점점 심해지는 가운데에서도 별다른 불쾌감을 느끼지 못한 것은 눈꺼풀 위의 요정 덕택이다. 그럼에도 정말이지 기나긴 계단이었고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대체 삼층짜리 건물에 지하 오층은 족히 될 법한 이런 지하실이 다 뭐란 말인가. 이미 가방이 문제가 아니라 고대의 보물이라도 나와야만 할 듯한 분위기였고 나는 혼자서 킬킬댔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좁은 통로에 반사되어 기괴하게 변한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나를 후려친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나를 삼키려 들고 있었다. 계단 꼭대기를 올려다보았지만 아득히 멀리 보이는 네모진 빛 따위는 없었다. 위도 아래도 앞도 뒤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 홀로 떠 있는 듯한 섬뜩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기서 랜턴이 꺼지기라도 하면 나는 꼼짝없이 암흑 속에 고립될 터였다. 조금 전부터 무의식 속을 빙빙 돌던 심상이 하나의 완성된 문장으로 다가왔다.
저택의 지하에는 괴물이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온몸의 털을 잡아당기는 듯했다. 적어도 유령을 잡기 위해 묘지를 지키던 때에는 켈릭과 아르킨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완전한 혼자였다. 내 비명이 어둠을 뚫고 올라갈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주인님. 천장까지 쌓인 금발 소녀의 초상화를 생각했다. 집사님. 빨간 잉크가 긋고 지나간 불순한 기록들을 생각했다. 무덤가의 유령. 묘비석 앞의 꽃다발. 클로디아 아가씨의 옷.
주인님의 스케치북에서 보았던 아가씨를 생각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밝고 천진한 미소. 클로디아 아가씨의 냉담한 눈을 생각했다.
그리고 집사님.
"혼란스럽게 하지 말아주게."
지난밤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책을 앞에서부터 다시 넘기듯이, 목소리는 느릿하게 재생되었다.
"나는 내가 아가씨를 어떤 방식으로 대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네. 그리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테지."
그림자 드리워진 눈가. 목소리.
"이 저택이 남아 있는 한은 말이야."
젠장. 기억의 책장이 덮였다. 나는 랜턴에 남은 기름의 양을 확인했다. 어디 갈 데까지 가보자고.
오래지 않아 두 번째 문이 나타났다. 역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켈릭에게 망치 하나만 쥐여주면 다 때려부술텐데, 별로 재미없는 농담을 해보며 자신을 달래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는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나는 잔 로디엄의 아직 증명되지 않은 재능들을 나열한 목록에서 빈집털이 항목을 삭제했다. 대신 머리보다 약간 위로 손바닥만한 창이 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나는 랜턴을 높이 들어올리고 까치발을 해가며 창문 너머를 훔쳐보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유리에 반사된 내 얼굴뿐이었다. 요정이 혀를 날름거렸다. 젠장.
왼손이 다시금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나온 것은 빨갛게 녹이 앉은 자물통이었다. 나는 커다랗게 팔을 휘둘러 유리를 내리찍었다.
끔찍한 반향이 묵직한 질량으로 지하를 가득 메웠다. 귀를 막느라 하마터면 랜턴을 깨뜨릴 뻔했다. 겨우 자세를 되찾아 재차 랜턴을 치켜들었다. 발돋움. 멀리 캄캄한 공간 안쪽으로 보이는 것은
시체.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몇 차례나 발을 헛디딜 뻔하며 미친듯이 되짚어 올라오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식품 저장고 앞으로 돌아온 나는 온몸으로 집사님과 충돌했다. 몸이 무너져내림과 거의 동시에 랜턴 부서지는 소리가 무척이나 아득히 - 실상은 귀가 다 울릴 만치 요란했을 게 분명한데도 - 들려왔다. 조각난 랜턴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바지를 적시고 뺨을 적셨다. 집사님이 내 팔을 두드렸다.
"잔, 괜찮나?"
나는 간신히 팔다리를 끌어당겨 쓰러진 집사님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전신이 기름으로 질척거렸다. 랜턴의 일부였을 유릿조각이 손바닥을 찢어놓았지만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괜찮은가?"
괜찮을 리가요. 바닥을 짚은 팔이 파들파들 떨려왔다. 나는 입을 벌렸다. 그러나 공포가 목을 말라붙게 했는지 소리를 끌어내는 것이 몹시도 힘겹게 느껴졌다.
" "
흡사 짐승의 소리였다. 그제서야 나는 내 얼굴이 축축한 이유가 기름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사님은 안경을 고쳐쓰던 손길을 갑자기 나에게 향했다. 눈가에 맺혀 부옇게 번진 눈물인지 기름인지 모를 것을 닦아내는 손가락의 주인을 나는 멀거니 바라보았다.
"집사님…."
"말하게."
"집사님, 집사님…."
울먹임이 멎질 않았다.
"전 그냥 아가씨의 여행 가방을 찾으려고…."
"잔 로디엄!"
집사님의 두 손이 내 어깨를 꽉 붙들었다. 나는 흠칫하며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괜찮아, 진정해. 자네는 여기서 아무 것도 못 본 거야. 가방은 간밤에 내가 찾았네. 잠금장치가 완전히 망가졌더군."
반 박자 뒤, 내 목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시체가 있단 말입니다! 저기에, 바로 우리 발밑에요!"
집사님의 표정이 서서히 변화했다. 우려, 혹은 연민처럼도 보이는 감정이 안경알 너머로 비추어 보였다.
"그래, 있겠지. 여전히 아름답던가?"
빈정대는 것도 나를 책하는 것도 아니었다. 집사님의 말투는 마치 오래된 일기장을 들추어 자신이 기억하는 내용 그대로인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애잔한 향수 같은 것이 비추어 보이는 눈을 내리깔며, 집사님은 한숨처럼 말했다.
"부탁이니 잊어주게. 기억해서 좋을 게 없으니. 자물쇠를 다시 걸어야겠군."
몸을 일으키는 집사님의 옷에서 떨어진 기름이 내 다리 위로 번졌다. 집사님은 불편한 다리를 이끌어 통로 반대쪽으로 굴러가버린 지팡이를 주워들었다. 집사님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게. 이제 올라가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집사님의 등을 보며, 나는 불현듯 기시감을 느꼈다. 이제껏 몇 차례나 보아왔던 뒷모습. 그리고 앞으로
도 계속 그 등 뒤에서 지켜보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집사님은 결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 예감은 나를 슬프게 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요? 말씀해주세요, 집사님."
집사님의 뒷모습은 계단 끝,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곳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의 물음도 함께 흩어져갔다.
와 현재편 마지막 하나 남았네요 만세! ..할 일인가 이게...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