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핏 선잠이 들었나보다. 눈을 뜨니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는 목욕통 속이었다. 무릎을 감싸안고 그 위에 고개를 묻었다. 전신이 나른했다.
기름투성이 몸으로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 깨어나니 그새 날이 저물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시트며 이불이 난리도 아니었다. 나는 한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물기를 닦아내며 눈을 돌렸다. 공동 욕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와 시트, 이불보가 보였다. 몇 번이고 비누칠을 하고 헹구어봤지만 좀처럼 기름이 빠지질 않았다. 저걸 무슨 낯으로 세탁실에 던져둔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등을 기댄 목욕통 안에서도 누런 액체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지하실에 흩어진 랜턴의 잔해를 치우고 바닥에 고인 기름도 닦아야 할 텐데.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려다 따끔한 감각에 손바닥을 감싸쥐었다. 다 씻거든 붕대부터 찾아봐야겠다. 나는 길게 드러눕듯이 물에 몸을 담갔다.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투둑,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두겠다는 내 외침은 차가운 지하실 벽 사이를 윙윙 돌다 잦아들었지만 집사님에게는 들렸을 것이다. 어쨌거나 집사님은 다리가 불편하고 눈이 어둡다 뿐이지 청력에는 아무 문제도 없으니까. 결국 급료는 못 받게 생겼군. 집사님에게 거울값을 돌려드려야겠다 싶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형에게 편지라도 써둬야겠다. 그간 모아둔 돈으로 그럴듯한 선물이라도 하나 사들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가족.
머릿속으로 그려보던 형의 모습에 갑자기 아르킨의 얼굴이 더해졌다. 놀라는 얼굴. 사람들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는 건 못할 짓이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털어놓기도 뭣하다. 아무도 믿지 않거나, 아무도 남지 않게 되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러면 이 집에는 집사님과 미쳐버린 주인님, 어린 아가씨만이 남을 텐데. 아르킨이 클로디아 아가씨로 바뀌었다. 아가씨는 귀찮은 동행인을 떨구게 되어서 기뻐할까? 잘 모르겠다. 집사님이 아가씨를 혼자 보낼 것 같지는 않으니, 나에게 분개할지도 모르겠다. 집사님, 혹은 바르톨 앨번이라 불렸을 사람의 얼굴. 집사님에게 왜 아가씨를 대하는 <방식>이 필요할까? 주인님과 아가씨가 집사님을 가족에 가깝게 대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내 나이도 채 되기 전, 이전 주인님과 마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저택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들었지만 두 사람과 집사님의 위치는 처음부터 달랐을 터였다. 사용인, 그리고 고용주의 가족.
가족.
하마터면 목욕통을 엎을 뻔했다. 갑작스럽게 일으켜진 몸이 휘청거렸지만 나는 그대로 퉁겨지듯 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크리스티 히즈넨, 왕국력 471년 잠들다.
건국 기념제, 건국 500년을 기리는 의미에서 특히 성대하게 치뤄질 예정인.
입을 수 있는 옷이 없었다. 나는 누가 널어두었는지 모를 커다란 옷을 되는대로 꿰어입고는 머리칼에서 물을 마구 흐트리며 복도를 달렸다. 금세 3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그러나 내 눈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아가씨는 <정말로> 주인님의 동생이 아니었다! 그러면 누구의?
시체.
비참하게 말라붙은 여자의 모습이 망막에 새겨진 양 떠나질 않았다. 숨이 막혀왔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대체 누가?
신경증 환자의 노크 같았다. 나는 내가 고용인이라는 사실도 잊고서 작업실 문을 두들겨댔다. 제발 뭐든 나와다오. 이 방이 아니라면 침실인가? 돌아서려는 순간 기척도 없이 문이 열렸다. 해쓱한 몰골로 나온 주인님은 괴이쩍다는 눈길로 나를 보았다. 나는 가쁜 호흡을 진정하지 못하고 두 팔로 무릎을 짚은 채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변함없이 난장판이었다. 엉망으로 늘어진 물감과 파레트, 바닥에 내던져진 미완의 캔버스들. 그리고 이젤 위 캔버스에
황금빛 소녀가 있었다.
흡사 경배하는 듯한 동작으로 주저앉았다. 커다랗게 눈이 벌어졌다. 파랗게 갠 하늘을 등에 인 양산. 그 양산 아래, 눈부신 금발이 바람에 날린다. 여신의 것처럼 빛나는 미소에서는 강렬한 태양의 내음이 났다. 나는 넋을 잃고 소녀를 쳐다보았다. 실로 완전무결한 하나의 <존재>가 거기에 있었다. 누구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오롯한 아름다움이. 선명한 파람과 아찔한 금빛에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름답군요."
신성 모독을 저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존재 그 자체로 완벽한 무언가를 인간의 빈약한 어휘를 빌려 표현함으로써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만 같아 나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주인님을 올려다 보았다. 희열에 들뜬 눈동자와 마주쳤다. 광기와, 혹은 신열과도 비슷한 집착이 비추어지는. 일순 서글픔이 밀려왔다. 누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지요? 그러나 나는 그것을 묻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요. 그런데 대체 저게 뭐지요?"
주인님의 눈빛이 바뀌었다. 언젠가 한 번 보았던 끔찍한 표정과는 또 다른, 참혹하게 유린당한 자존감의 조각처럼 보이는 것이 떠올랐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하 창고에 있는 시체의 대리입니까?"
그러자 거짓말처럼 주인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하얀 물감을 뒤집어쓴 양 창백해진 뺨이 가늘게 경련했다. 발 아래의 땅이 사실은 늪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처럼, 주인님은 팔을 허우적거리며 내 어깨를 붙들었다. 충혈된 흰자.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심상. 나는 그런 주인님을 그저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다시 한 번 말해봐."
한참만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지독하게 쉬어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목청껏. 그러나 나는 말했다.
"지하에서 시체를 봤습니다. 여자였어요." 조금 고개를 들어, "저 소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요?"
그렇게 물은 순간 주인님은 나를 던지듯 뿌리쳤다. 뒤로 나동그라진 몸을 일으켜세우니 계단을 내달리는 깡마른 뒷모습이 보였다. 화급히 뒤쫓았지만 주인님은 벌써 지하실로 내려가고 있었다. 소용 없는 일이라고 말해야 했다. 거긴 잠겨 있는데. 더군다나 랜턴도 없었다.
사금파리가 밟혀 부스러졌다. 또다시 기름이 신발에 달라붙었다. 빛 한 점 없는 막막한 암흑 속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벽을 더듬으며 내려가야 했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대고 소리쳤다.
"올라오세요, 주인님! 열쇠가 있어야 해요!"
그러나 달음박질치는 소리가 점점 멀어질 뿐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차라리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주인님이 나를 구해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주먹으로 철문을 때리는 소리가 귓전을 꽝꽝 울렸다. 한 손으로는 귀를 틀어막고 한 손으로는 숨막히는 어둠을 헤집어 내려가기를 한참, 벽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짐승의 것 같은 오열이 터져나왔을 즈음에는 가장 밑바닥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제발, 주인님, 열쇠를 가져와야 합니다. 예?"
막무가내로 철문을 내리치는 주먹을 막으려다 나는 그만 기겁하고 말았다. 주인님은 주먹이 아닌 머리를 짓찧고 있었다. 울음은 점점 처참하게 변화하며 고막을 난자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현기증이 나려 했다. 시계視界가 - 온통 새카맣게 칠해진 바로 그 상황에서 - 핑그르르 한 바퀴 회전했다.
나
는
비틀거리며 계단을 딛고 올라섰다. 벗어나야 했다. 여기에 있다가는 정말로/눈을 감아버렸다. 어차피 보이는 것도 없었다. 나는 벽에 몸을 기대고 서서 주인님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허공을 향해 발을 뻗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당장이라도/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겠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주인님의 손이 뒷목을 잡아챌 듯한 공포에 떨며 나는 조금씩 조금씩 지상으로/ 혼자서 저 어둠을 되짚어 올라갈 용기가 도저히 생기지 않았다. 벽이 진동하는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인님의 오열은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다. / 것인지 내 팔다리가 떨리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그냥 조용히 그만두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면 되었을 것을. 머리를 감싸쥐며 차가운 돌바닥에 웅크려앉았다. 꿈이라면 제발 깨어나다오, 제발 누군가 깨워주기를, 제발 누군가,
돌연 주인님의 울음이 멎었다. 머리와 쇠가 부딪치는 끔찍한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어둠이 무너지며 아침 햇살이 쏟아져드는 침대에서 눈을 뜨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반대였다. 꿈이 진행되고 있었다.
철문이 열렸다.
태초의 빛이 태어났다. 주인님은 오랜 시간 닫혀 있던 문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둔탁한 총성이 울렸다.
현재편 종료, 과거편은 언젠가..언젠가....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