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늦은 오후는 기분이 나쁘다. 우산을 펼쳐들며, 리헬은 잠시 마차를 대기시킬까 생각했으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품삯이라면 이미 앨번이 지불해 놓았을 터인 마차는 별 다른 말 없이 큰길을 따라 멀어져갔다. 리헬은 커다란 바퀴가 고인 물웅덩이를 가르는 뒷모습에 눈길을 주다가, 이내 우산을 고쳐잡고 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미 폐관 시간은 넘어 있었지만 전화를 통해 미리 언질을 해둔 덕분에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뚝뚝한 얼굴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리헬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곧바로 직원실 안에서 보관하던 스케치북을 꺼내왔다.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다."
내지를 한두 장 넘겨 확인하던 리헬이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아, 혹시 한 번 더 전시장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연필 같은 걸 두고 오진 않았나 싶어서.."
직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죄송하지만 입장은 다섯 시까지입니다. 청소 담당자는 그 스케치북 말고 다른 것은 없었다고 하더군요."
어설픈 핑계가 들통난 기분이 들어 리헬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황망한 인삿말을 남기고 전시관 입구로 빠져나왔다. 가방을 한 손에 든 채로 우산을 펴려 잠시 애쓰다가, 결국 가방을 한켠에 내려놓고서야 우산을 펼 수 있었다. 그러다 힐금 고개를 돌리면 비 때문인지 관람 시간이 지난 때문인지 실내로 옮겨 세워둔 안내판이 보였다. 붙어 있는 선전지에 인쇄된 것은 리헬이 몇 번이나 반복해서 모작해온 그림이었다. 동양풍의 검은 옷을 입은,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이 불분명한 작은 체구의 사람이 창가를 배경으로 서 있는 그림.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저 이 그림 하나를 실물로 보고 싶어서 독일 여행을 꿈꾸어 왔었는데, 설마 이 나라에서 던스트전展이 열릴 줄이야. 하루에 한 번씩 전시회를 보러 가, 넋 놓고 그림들을 둘러보다 오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오늘 약간 달랐던 것은 휴식 겸 오가는 사람들을 스케치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두 권 들고 나온 스케치북 중 헌 것을 잊고 말았다.
저택의 사용인을 보내면 될 것을 굳이 직접 나온 것은 얼마 안 되는 리헬의 고집스런 점이었다. 집사인 앨번이 만류했지만 리헬은 듣지 않았다. 핑계삼아 전시관에 한 번 더 가볼 수 있다면 그저 기뻤다. 결국 입장할 수는 없었지만. 한숨. 리헬은 한 손으로 선전지를 쓰다듬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나도……."
그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축 늘어진 어깨로 리헬은 터덜터덜 전시관을 나와 걷기 시작했다. 마차를 잡아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걸음은 이미 대로를 벗어나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어느덧 해가 떨어졌는지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빗소리가 귀를 때리고 빗줄기가 다리를 때렸다. 슬슬 추워질 시간이다. 이 지방은 낮과 밤의 온도차가 크다. 가방을 거의 끌어안듯이 하며 리헬은 조용히 걸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았다.
무엇이었을까, 순간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것이 있었다. 우뚝 발이 멈추었다. 천천히 시선이 돌아간다. 구둣가게 건물과 빵집 건물 사이, 비좁은 골목이었다. 금발의 소녀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쏟아지는 비 아래 무방비하게 널브러진 몸이 조그맣다. 리헬은 홀린 듯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가방이 툭 소리를 내며 손에서 떨어졌는데도 깨닫지 못했다.
<그림>이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리고 또 그려왔던 그 그림 속의 소녀였다. 소녀라고 하기엔 몹시 어리다는 것을 제외하면, 의상도 배경도 다르지만 얼굴만은 그대로 이젤 속에서 끄집어내어진 듯 똑같았다. 물기를 머금어 둔탁하게 반짝이는 금발. 뺨에 손을 대자 느껴지는 한기에 몸이 떨렸다. 매끄러운 피부. 코 아래 손을 가져다대니 가냘픈 호흡이 느껴졌다.
리헬은 우산을 내팽개쳤다. 정면으로 떨어지는 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아이를 두 팔로 안아올렸다. 일순 몸이 크게 휘청거렸지만 용케 균형을 잡고, 이내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걍 슬렁슬렁이라도 쓰고 치워버리고 싶어서^^;;; 처음 쓴 게 2005년인가 그랬으니 이젠 정리할 때도 되었죠 흐흑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