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들어, 이 골목으로 쭉 달려가면 오솔길이 나와. 그 길을 따라서 다른 마을로 가. 거기까진 감시하지 않을 거야. 절대 돌아와선 안 돼. 네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몰해선 안 돼. 모든 사람이 널 해칠 거야. 전부 잊어버려.
…너도?
…나는…. …어서 가!
총성이 들려온다. 건물 뒤편에 숨은 소년이 소녀를 골목길로 밀어낸다. 소녀는 머뭇머뭇거리다, 고개를 한 번 주억거리고는 달리기 시작한다. 벽 너머, 불타는 건물 안에서 분노한 군중이 누군가를 난폭하게 끌고 나오고 있다. 흐트러진 금발을 늘어뜨린 마른 사람이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불분명한 외모. 목과 가슴팍에서 피가 번지고 있다. 죽은 듯 움직이지 않는 그가 바닥에 내던져진다. 벽 뒤에서 훔쳐보던 소년이 입술을 일그러뜨린다.
그의 얼굴은 어떤 소녀와 꼭 닮아 있다.
결국 합격자 통지서는 오지 않았다. 던스트전展이 끝나고 시작된 아마추어 전시회에 작품을 냈지만 이번에도 떨어진 것이다. 미술관을 찾은 리헬은 의기소침한 채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포에티는 함께 오지 않았다. 최근들어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 잦았다. 일찍 일어나 혼자 저택을 나서며, 그나마 노윈이 다시 출장지로 떠났다는 사실이 반가울 뿐이었다.
"아…."
문득 한 그림 앞에서 발이 멈추었다. 한눈에도 들어오는 강렬한 색감. 그러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모델 쪽이었다. 어딘지 포에티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금발과 창백한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작가의 이름을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J. 멜빌른이라는 이름의, 처음 듣는 이였다. 리헬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자리를 뜨지 못하다가, 불현듯 휙 걸음을 돌려 전시장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꽃다발을 사들고 돌아온 그는 안내처의 젊은이에게 꽃을 내밀었다.
"저, 멜빌른이라는 분께 좀 이걸 전해주십시오!"
"혹시 아는 분이십니까?"
"예? 아뇨, 저기, 저는 그냥..."
리헬이 허둥대는 사이, 회색 눈의 직원은 깍듯한 동작으로 꽃을 받아들더니 일순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제가 멜빌른입니다. 감사히 받도록 하지요."
그는 자신을 자네리 멜빌른이라고 소개했다. 지방 출신으로, 도시 상경은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리헬은 그를 식사에 초대했다. 포에티 이후로는 오랜만의 손님 맞이였다. 스타일도 좋아하는 구도도 색을 쓰는 방식도 전혀 달랐지만, 처음에는 독학으로, 나중에는 소규모의 교습실에서 그림을 배웠다는 점이 공통점이었다. 무엇보다, 자네리도 던스트를 좋아했다. 두 사람은 죽이 맞아 한참동안 열성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우울하던 기분이 많이 풀린 상태로 리헬은 앨번의 부름을 받았다. 저녁 준비가 다 되었다. 리헬과 자네리는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마리카?"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것은 포에티였다. 그런데 자네리의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뀌었다. 포에티를 보더니 낯빛이 바뀐 것이다. 포에티는 자신을 떼어 놓고 혼자 전시관에 다녀온 리헬에게 토라진 얼굴을 해보이면서도, 묘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네리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리헬이 포에티를 소개하자, 그제야 자네리는 어색하게 몸을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인가 충격을 받았다는 표정을 미처 감추지 못했다.
식전의 한담 시간에 비해 식사 자리는 어딘지 불편했다. 덕분에 식사는 리헬이 예정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끝나버렸다. 포에티는 평소에 비해 별로 먹지도 않은 채 자기 방으로 휙 올라가버렸고, 자네리도 음식을 거의 남긴 상태였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에 찬 것을 리헬은 놓치지 않았다. 응접실로 이동해, 다시금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대화는 조금 전처럼 활기를 띠지 못했다. 조용한 밤, 응접실의 테이블에 차와 다과를 놓은 채 두 사람 사이를 침묵이 가라앉았다. 리헬은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무엇인가 화제를 꺼내겠다고 생각했으나 자네리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아까 그 아이가..."
"예?"
다시 침묵.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말을 시작한 것은 리헬이었다.
"포에티를 아십니까?"
자네리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온 것은 무엇인가 두려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제가 아는 아이가 맞다면...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녀를 모릅니다. 그녀 역시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더군요."
"어떻게 그럴 수가..."
"뭔가 아시는 게 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아는 그 아이의 이름은 마리카입니다. 포에티는.. 제 기억이 맞다면 마리카의 아버지 이름이었고요. "
자네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탁자 위에 고정되어 있던 그의 시선이 서서히 올라왔다. 그는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제 고향은 시골 마을입니다. 제가 열한 살 때 마을엔 연속된 실종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범인은 제 옆집에 사는 남자였죠. 그는 오랫동안 혼자 살았어요.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집에 아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금발의 아주 예쁜, 예, 마리카였습니다. 전 그 아이와 아주 친했었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자네리 씨가 열한 살 때라면 포에티는…,"
"소문에 의하면," 자네리는 말을 잘랐다. "마리카의 아버지는, 십 년 동안 같은 곳에서 똑같은 얼굴로 살았다고 하더군요."
리헬의 얼굴이 헬쓱해졌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자네리는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실종된 사람들은 전부 너덜너덜해진 시체로 그 집 지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마치 짐승의 이빨에 의해 뜯겨나간 것처럼요."
"설마..."
"예. 그들은 전부 잡아먹힌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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